이번 구례 여행은 사실 계획적이지 않았다. 바쁘게 살다 보니 자꾸만 마음이 말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어디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괜히 시선을 끌던 이름. 구례. 솔직히 말하면 “거기 뭐 있지?” 하는 생각부터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이름이 계속 따라다녔다. 그래서 그냥 짐을 챙겼다.

목월빵집
구례 읍내의 시내 골목 안쪽에 자리 잡은 목월빵집이 있었다. 들어가기도 전에 고소한 빵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어린 시절 방학 때 할머니 집 앞 빵집에 있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빵 냄새에는 그런 힘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따뜻한 기운이 확 느껴졌다. 빵이 줄지어 놓여 있었는데, 진열대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정직해 보이는 빵집이었다. 나는 단팥빵을 하나 집어 들었다. 사실 단팥빵을 즐겨 먹는 편은 아니다. 그런데 이 집은 ‘우리밀’을 사용하고 심지어 구례에서 나고 자란 농산물을 쓴다고 했다. 직접 만든 앙금이라고 하니 하나 먹어보고 싶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겉바속촉 느낌! 팥 알갱이가 살아 있어서 씹히는 맛이 달랐다. 달지 않고 은근한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괜히 행복한 웃음이 났다. “아, 이게 진짜 단팥빵이구나.” 순간적으로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게 안쪽에서는 주인장이 빵을 굽고 있었는데, 손놀림이 바쁘면서도 정갈했다. 누군가의 고집과 손길이 들어간 음식이라는 건 그냥 먹어보면 알 수 있구나. 그 짧은 순간에도 그게 느껴졌다.
숲과 브런치
점심은 숲과 브런치라는 곳으로 갔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그냥 흔한 브런치 카페 일 것 같았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달랐다. 큰 창으로 숲이 탁 트이게 보였고, 바람이 스르르 불어왔다. 공간 자체가 자연과 어우러져 있는 느낌이었다.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는 정원이 마련되어 있어서 가족 단위 손님들이 무척 많았다. 웃음소리, 뛰는 발자국 소리. 보통은 시끄럽다고 느낄 수도 있는데, 이상하게 이곳에서는 그 소리마저 자연스러웠다.
브런치 플레이트와 파스타를 시켰다. 음식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정갈했다. 신선한 채소, 담백한 계란, 따뜻한 빵. 크림 파스타는 많이 느끼하지 않고 너무 부드러웠다. 창밖을 바라보며 음식을 먹으니 맛이 배가되는 듯했다.
다른 테이블에서는 젊은 연인이 사진을 찍고 있었고, 저쪽에는 아이와 채소를 두고 전쟁을 치르는 엄마의 모습도 있었다. 이런 장면들이 오히려 풍경처럼 내 눈에 들어왔다. 마치 식당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그림 같았다.
천은사 상생의 길
마지막으로 간 곳은 천은사 상생의 길이었다. 이름만 들었을 때는 솔직히 별 기대 없었다. 그냥 사찰 입구 길쯤 되겠거니 했는데, 막상 들어서니 달랐다. 공기가 다르다고 해야 하나. 바람이 나무 사이를 지나며 얼굴을 스쳤는데, 그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가벼워졌다.
길은 그리 가파르지 않았다. 걸음이 자연스럽게 천천해졌다. 흙냄새,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 햇살이 만드는 그림자. 눈에 보이는 건 단순한 풍경이었지만, 그 단순함이 마음을 잡아끌었다.
벤치에 잠시 앉아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오히려 더 많은 게 들렸다. 새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발자국.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한 순간이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길의 끝에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아쉽다는 마음이 자꾸 발걸음을 붙잡았다.
돌아오는 길
창밖으로 스쳐가는 산과 논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번 여행은 화려하지 않았고, 큰 계획도 없었다 그렇다고 유명 관광지도 아니었다. 그런데 빵집에서의 한입, 숲과 브런치에서의 여유로움이 있었으며, 천은사 길 위의 바람. 그 단순한 순간들이 오래오래 남았다.
여행이란 결국 화려한 기록이 아니라, 그 시간에 내가 무얼 느꼈는지에 달려 있는 것 같다. 구례는 그런 점에서 조용히 마음을 흔들었다. 다음에 다시 간다면 더 오래 머물고 싶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