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저는 원서만 많이 읽으면 영어 실력이 자연스럽게 늘 거라고 믿었습니다. 얇은 챕터북을 여러 권 사다 놓고, 매일 몇 페이지씩 읽게 했습니다. 권수가 쌓일 때마다 괜히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책 내용이 뭐였어?"라고 물었더니, 아이는 한참 생각하더니 "음… 강아지 나왔어"라고만 대답했습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읽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에 남아 있지는 않았다는 걸요.
같은 원서를 읽어도 실력이 쑥쑥 오르는 아이가 있고, 몇 년째 제자리걸음인 아이가 있습니다. 차이는 책의 난이도가 아니라 읽는 방식에 있었습니다. 상위권 아이들은 단어를 점이 아니라 덩어리로 보고, 음원과 함께 읽으며, 우리말 사고력을 먼저 키웁니다.
단어를 테마별로 묶어서 구조화하기
제가 예전에 아이에게 단어 공부를 시킬 때는,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뜻을 적고 외우게 했습니다. 시험 보듯이 확인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책에서 또 같은 단어를 몰라했습니다. 그때는 아이가 대충 외웠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제가 구조를 안 가르쳐준 거였습니다.
원서에는 테마별로 반복되는 핵심 어휘가 있습니다. 가족 이야기를 읽는다면 sibling, chore, tradition, ancestor 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Because of Winn-Dixie 같은 책을 읽을 때 이런 기본 단어들을 알고 있으면, 중간중간 막히는 부분이 확 줄어듭니다. 모험물인 Magic Tree House를 읽는다면 explore, treasure, journey, obstacle 같은 단어들이 계속 나옵니다.
단어를 하나씩 따로따로 외우는 게 아니라, 장르별로 묶어서 세트로 익히면 훨씬 효과적입니다. 예를 들어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를 배울 때도 happy만 외우는 게 아니라, delighted, upset, relieved처럼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른 단어들을 함께 익혀야 합니다. 실제 원서에서는 같은 상황이라도 문맥에 따라 다른 단어를 쓰기 때문입니다.
제가 직접 확인해 보니, 아이들이 숙제를 homework라고 배웠는데 원서에는 assignment가 더 자주 나왔습니다. 쉬는 시간도 break보다는 recess가 훨씬 많이 등장했습니다. 걷는다는 표현도 그냥 walk가 아니라, 여유롭게 걸으면 stroll, 조심히 걸으면 tiptoe처럼 구체적인 동사를 씁니다. 이런 단어들을 미리 알고 있으면 문장이 훨씬 부드럽게 읽힙니다.
구동사도 중요합니다. give는 알지만 give away, give up처럼 전치사가 붙으면 새로운 단어처럼 느껴집니다. play도 mess around(장난치다), fool around(까불다), hang out(어울리다)처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이런 구동사를 함께 익혀야 원서가 막히지 않고 수월하게 읽힙니다.
음원을 틀고 따라 읽는 방식의 힘
AR 4점대 이전까지는 음원을 틀고 읽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냥 읽으면 되지, 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혼자 읽을 때는 문장을 뚝뚝 끊고, 억지로 해석하듯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어느 날 음원을 틀고 함께 따라 읽어봤습니다. 리듬이 붙으니 아이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문장이 덩어리로 들리는 경험을 처음 해본 것 같았습니다. 발음이 완벽하진 않았지만, 속도가 아니라 흐름이 생겼습니다. 그날 이후로는 원서를 해석하는 시간이 아니라 따라 읽는 시간으로 바꿨습니다.
파닉스의 원리는 음원과 문자의 매칭입니다. 5, 6학년이라고 해서 파닉스 과정을 다시 할 필요는 없지만, 음원을 틀고 텍스트를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발음이 좋아지고 문장 구조에 익숙해집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입으로 따라 하는 3중 입력이 동시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해리 포터나 나니아 연대기 같은 두꺼운 책을 읽는 아이들 중에는 음원을 틀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건 이미 AR 5점대 이상의 실력을 갖춘 경우입니다. 그 이전 단계에서는 눈으로만 읽는 것보다 음원과 함께 읽는 게 훨씬 효과적입니다. 영어 텍스트가 아직 낯선 아이들에게는 귀가 도와줘야 합니다.
한 템포 앞서 나가는 오디오를 귀로 들으면서 눈으로 따라가는 방식으로 읽으면, 문장의 호흡과 리듬을 자연스럽게 익힐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을 최소한 AR 4점대 전까지는 계속 유지하는 게 좋습니다. 제 경험상 이 시기를 놓치면 나중에 따라잡기가 훨씬 어려워집니다.
우리말 독서가 영어 실력을 키운다
가장 크게 깨달은 건 의외로 영어가 아니었습니다. 우리말 독서의 힘이었습니다. 영어만 붙잡고 있을 때는 아이가 원서를 읽어도 깊이 있는 질문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한동안 우리말 책을 많이 읽고 나니, 영어 책에서도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같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해력은 언어가 아니라 사고력입니다. 우리말로 복잡한 문장을 이해해 본 경험이 없다면, 영어로도 결국 표면만 읽게 됩니다. 초등학교 때는 사실 티가 잘 안 납니다. 문장도 잘 읽고 단어도 잘 읽고 해석도 잘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학교에 진학하면 그때부터 정과목의 사고력이 영향을 많이 끼치기 시작하고, 그때 비로소 차이가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mad cow disease라는 표현이 나왔을 때, 사고력과 어휘력이 부족한 아이들은 이걸 미친 소병이라고 해석합니다. 하지만 우리말 책을 많이 읽고 배경 지식이 있는 아이들은 바로 광우병이라고 이해합니다. 단어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아니라, 광우병에 연관된 이야기와 배경 지식까지 함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글 읽고 쓰는 능력, 즉 문해력은 영어뿐만 아니라 전 과목에 영향을 미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차이는 중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납니다. 초등 부모님들이 이걸 잊지 말고 영어 읽기와 함께 우리말 사고력을 챙겨 주시면, 초등학교 때 투자한 시간과 돈과 아이들의 노력이 중고등학교에 가서 빛을 발하게 됩니다.
한 번은 아이가 읽은 원서를 한 줄로 요약해 보라고 했습니다. 처음엔 "몰라"였습니다. 그래서 "단어 세 개만 말해봐"라고 낮췄습니다. "Boy. Storm. Lost." 그 세 단어를 이어보니 이야기가 보였습니다. 완벽한 문장이 아니라도, 아이가 구조를 잡기 시작한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우리 집 원서 읽기가 조금 달라진 건, 권수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부터였습니다. 예전엔 몇 권 읽었는지 세었고, 지금은 한 권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봅니다. 예전엔 모르는 단어 개수에 신경 썼고, 지금은 핵심 단어 묶음을 이야기해 봅니다. 예전엔 속도를 올리려 했고, 지금은 음원을 틀고 천천히 따라 읽습니다.
아이의 실력이 갑자기 뛰어오른 건 아닙니다. 하지만 문장을 겁내지 않게 됐습니다. 이해가 먼저라는 걸 몸으로 익히고 있는 느낌입니다. 상위권의 비밀이 대단한 비법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기본을 다르게 쌓는 방식이었습니다. 단어를 묶어보고, 소리로 익히고, 우리말 사고력을 먼저 키우는 것. 결국 특별한 길이 아니라,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은 조급함이 조금 줄었습니다. 원서를 읽는 시간이 점수 준비가 아니라, 생각을 키우는 시간처럼 느껴집니다. 그 변화가 저희 집에서는 가장 큰 수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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