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이번 괌 여행은 큰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지쳐 있었고, 바다 냄새가 나는 곳에 가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괌 어때?”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가방을 챙겼다. 준비물이 엉성했지만, 그게 오히려 더 마음을 가볍게 했다. 여행은 원래 그렇게 시작되는 게 맞는지도 모른다.
목차
- 투몬비치
- 아나라잔 자연풀장
- 반타이
- 돌아오는 길에
투몬비치
첫째 날, 숙소 문을 나서자마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습도는 많이 높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바람 속에 섞여 있는 바다 냄새가 오히려 기분을 풀어줬다. 투몬비치까지 걸어가는 동안 모래에 달라붙는 습기, 상점 앞에서 들려오는 음악, 그리고 아침 햇살이 하나의 배경 음악처럼 어우러졌다.
해변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다의 색이었다. 누군가는 “에메랄드빛”이라고 말하겠지만, 내 눈에는 그냥 ‘투명한 파랑’으로 다가왔다. 너무 선명해서 오히려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말문이 막혔다. 물에 발을 담그자 “아, 여기까지 왔구나” 실감이 났다.
나는 모래 위에 수건을 펴고 누웠다. 파도소리가 가만히 등을 두드리는 듯했다. 옆에선 아이들이 모래성을 쌓고, 연인들은 셀카를 찍고 있었다. 그런데도 시끄럽지 않았다. 모든 풍경이 이상하리만치 잘 맞아떨어졌다. 눈을 감으면 마음이 바다에 흘러 들어가는 것 같았다.
물에 직접 들어갔을 때의 기분은 또 달랐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 사이로 몸을 맡기니,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떠 있는 순간, 내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이 사라졌다. 그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이나라잔 자연 풀장
둘째 날, 우리는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도로 양쪽으로는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바다가 보였다. 창문을 열자 바람이 세차게 들어왔고, 바닷소금기와 숲의 냄새가 섞여 묘한 향을 만들어 냈다. 도착하기 전부터 우리는 이곳이 특별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나라잔 자연 풀장은 말 그대로 자연이 만든 수영장이었다. 인공적인 장식도, 가이드북에서 보던 화려한 표지판도 없었다. 단지 숲 속에 숨겨진 웅덩이 같은 공간이었다.
발을 담갔을 때는 솔직히 “너무 차갑다”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하지만 몇 초 지나자 차가움이 사라지고, 그 대신 몸 안이 맑아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속에 몸을 맡기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나무 사이로 빛이 흩어졌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조용했다.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며 소리를 질렀고, 여행 온 사람들은 웃으며 물놀이를 즐겼다. 나는 그 사이에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생각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잘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숲은 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묵직한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반타이
우리는 여행 마지막 날에 반타이라는 식당에 갔다 사실 처음에는 괌까지 와서 “굳이 태국 음식?” 하는 마음이 들었다. 막상 들어서자마자 생각이 바뀌었다. 식당 안은 향신료 냄새로 가득했고, 매콤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이는 향이었다.
우리는 똠얌꿍, 팟타이, 그린 카레 등등 여러 메뉴를 시켰다. 음식이 나오자마자 색감에 놀랐다. 빨강, 노랑, 초록… 테이블 위가 무슨 작은 축제 같았다. 똠얌꿍 국물을 한 숟갈 떠 넣자마자 입 안이 얼얼해졌다. 그런데 신맛, 매운맛이 섞여 희한하게 조화를 이뤘다. 한 번 먹고 나니 정말 멈출 수 없었다.
친구와 대화를 별로 나누지는 않았다,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우리는 태국음식에 매료되었다.
좋은 음식 앞에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우리가 시킨 메뉴들은 하나 같이 맛있어서 남은 음식 없이 그릇이 싹싹 비워졌다.
창밖으로는 괌의 밤이 내려앉고 있었다. 낮과는 다른 고요함 속에서, 식당 불빛이 따뜻하게 번졌다. 그 풍경과 함께하는 식사라니, 굳이 비싼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만족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 창밖으로 바다가 작아지는 걸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은 꼭 대단할 필요가 없구나.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몇 개의 명소를 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그 순간 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 그게 전부였다.
투몬비치에서의 바다, 이나라잔 풀장의 맑은 물, 반타이에서의 매콤한 향. 이 세 가지 기억은 서로 다른 듯하지만, 결국 한 줄로 이어졌다. 그리고 내 일상 속에 작은 불빛처럼 오래 남을 것이다.
다음에 괌을 또 가게 된다면 더 오래 머물고 싶다. 해가 지는 투몬비치를 하루 종일 지켜보고, 풀장에서 아무 말 없이 책을 읽고, 반타이에서 맥주 한 잔을 곁들인 저녁을 다시 즐기고 싶다. 이번 여행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래도 여운은 깊이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