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시작되면 마음이 자꾸 흔들린다.
어디론가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이유 없는 마음의 울림이 있다.
하루하루 반복되는 일상이 나쁘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지금 이대로 괜찮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날도 그랬다... 커피잔을 들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바람이 창문을 살짝 두드리며 속삭였다.
“이제 떠나도 돼.” 그래서 망설이지 않았다.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지도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그냥 남쪽으로 달렸다.
회색 건물들이 멀어지고, 도로 옆으로 초록빛 대신 갈색과 노랑빛이 조금씩 섞여 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을 냄새가 스며든 도시... 문경에 닿았다.
봉천사 개미취
처음 찾은 곳은 봉천사 개미취 축제였다.
처음엔 단순히 꽃구경 정도로 생각했는데, 차에서 내리자마자 풍경이 나를 멈춰 세웠다.
산 아래로 이어진 길은 온통 보랏빛이었다.
햇살을 머금은 개미취꽃들이 바람에 일렁이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피어난 이 보랏빛 물결은 조용하지만 강렬했다.
한참을 서 있었다... 바람이 내 머리칼을 스치고, 꽃잎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그 움직임이 마치 내 마음을 닮은 것 같았다.
햇살은 부드럽게 내려앉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마저도 이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웠다.
잠시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꽃잎 사이로 흙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그 단순한 순간이, 이상할 만큼 벅찼다.
‘이런 게 진짜 여행이지.’ 무언가를 보러 간 게 아니라, 그냥 잠시 멈춰 서서 ‘살아있다’는 걸 느끼는 것.
불정역
다음으로 향한 곳은 불정역이었다.
기차가 멈추지 않는 역. ‘불정’이라는 이름부터 어쩐지 쓸쓸했다.
작은 간판 하나, 녹슨 철로, 그리고 낡은 플랫폼.
기차는 이미 오래전에 떠났지만, 그 자리는 여전히 ‘기다림’의 온도를 품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바람이 불어오고, 낙엽이 바닥을 스쳤다.
그 소리가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칙칙폭폭—” 상상 속에서 기차가 지나갔다.
그 소리에 마음이 묘하게 따뜻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한 그곳에서 나는 오랜만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쉼’을 배웠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건 이런 고요함일지도 모르겠다.
불정역은 비록 멈춰 있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나는 다시 움직일 힘을 얻었다.
참나무장작구이
해가 지고, 하늘이 붉게 물들 무렵.
도로 한편에 ‘문경약돌돼지 참나무장작구이’ 간판이 보였다.
운전하며 내내 고기 냄새를 상상했는지, 그 순간 그냥 본능처럼 차를 멈췄다.
가게 안으로 들어가자 참나무 장작이 천천히 타들어가고 있었다.
불빛이 고기 위로 부드럽게 번졌고, 공기에는 구수한 향이 가득했다.
“약돌돼지는 뭐예요?” 나도 모르게 묻자,
사장님은 미소 지으며 “약돌을 먹여 키운 돼지라 지방이 훨씬 부드러워요.” 하고 말했다.
삼겹살이 익어가는 동안 장작 타는 소리와 불빛이 묘하게 어울렸다.
노릇노릇한 고기를 한 점 입에 넣는 순간...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혀를 감쌌다.
그 향과 온기가 몸 구석구석을 데워줬다.
된장찌개는 따뜻했고, 밥 위에 고기 한 점, 마늘 한 쌈.
그 단순한 조합이 어쩐지 눈물 나게 맛있었다.
창밖에는 노을이 사라지고, 가게 앞의 들풀들이 바람에 고개를 숙였다.
그 순간, 오늘 하루가 너무도 완벽하게 느껴졌다.
돌아오는 길
문경을 벗어나며 창문을 반쯤 내리니 밤공기가 밀려들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 묘한 평온함이 섞여 있었다.
불정역 근처를 다시 지나칠 때,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그 불빛 아래로 낙엽이 천천히 흩날렸다.
“이 계절이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이렇게 멈춰 서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생각이 마음속에서 맴돌았다.
도시는 늘 빠르게 돌아가지만, 문경에서의 하루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고 있어 내 마음의 위로였다.
개미취꽃의 보랏빛, 불정역 주변의 산세가 어우러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그리고 장작 향이 남은 맛있는 고기 한 점.
그 모든 게 내 마음속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터널을 빠져나올 때, 라디오에서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나는 그 멜로디에 맞춰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음 계절이 오기 전, 또 이런 하루를 만나야지.”
그 말이 마음속에서 오래도록 울렸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가을의 공기 속에서 마음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