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
딱히 나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가슴 한쪽이 계속 무겁게 눌려 있었다.
아무리 커피를 마셔도, 음악을 들어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그럴 땐 언제나 그렇듯, 나는 길 위에 서기로 했다.
‘멀지 않은 곳, 조용하고 사람 많은 곳 말고…’ 그렇게 고른 곳이 산청이었다.
차를 몰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도시의 회색빛이 점점 사라지고, 산의 초록이 진해졌다.
창문을 살짝 내리니, 바람 냄새가 달랐다. 풀 냄새, 흙냄새, 그리고 조금은 낯선 시골의 공기.
그걸 맡는 순간, 갑자기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럭셔리글램핑 W 풀빌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럭셔리글램핑 W 풀빌라는 생각보다 훨씬 고요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은은한 나무 냄새가 먼저 반겨줬다.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산의 능선, 풀장 위로 떨어지는 햇살, 그 모든 게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가방을 내려두고 의자에 앉았는데, 한참을 그냥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그동안 너무 많은 말을 하고, 너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게 다 쓸모없는 소음이었단 걸 이 조용한 공간이 알려주는 듯했다.
노을이 물들기 시작할 즈음, 물결 위로 빛이 반짝였다.
풀장에 발을 담그니 물이 시원하게 발끝을 감쌌다.
햇살과 바람이 서로 장난치듯 머리를 스치고, 그 순간 나는 잠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밤이 오고, 불멍 화로에 불을 붙였다.
나무가 타들어가며 ‘탁탁’ 소리를 내는 게, 묘하게 위로가 됐다.
불빛이 얼굴을 비추고, 별이 쏟아졌다.
조용했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꽉 찬 느낌이었다.
카페 묵실
다음 날 아침,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에 눈이 떠졌다.
전날의 공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천천히 준비하고, 산청 읍내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들어간 곳이 ‘묵실’이라는 카페였다.
작고 따뜻한 공간, 도착하자마자 입구에 걸린 목재 간판이 마음에 들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구수한 커피 향 대신, 달콤한 캐러멜 냄새가 먼저 코끝을 간질였다.
그곳의 시그니처 메뉴는 꿀카이막과 기름병밀크티였다.
이름부터 독특하고 신기해서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나무 트레이 위에 담긴 꿀카이막이 나왔다.
진한 꿀 향이 퍼지면서, 고소한 크림이 부드럽게 스며드는 그 순간.. 한 입 먹자마자 입안이 포근해졌다.
달달하면서도 은근한 치즈의 향이 어우러져, 마치 따뜻한 오후 햇살을 먹는 기분이었다.
기름병 모양의 유리병에 담긴 밀크티도 참 인상적이었다. 보는 순간 웃음이 났다.
한 모금 마시니, 홍차의 향이 은은하게 감돌고 우유의 부드러움이 뒤따랐다.
달지 않아서 오히려 더 오래 음미하게 되는 맛이었다.
카페 안은 잔잔한 음악이 흘렀고, 아늑함과 고요함을 만끽하기 충분했다.
고즈넉한 예스러움도 너무 맘에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이 너무 편안해져서 더욱 좋았던 것 같다.
모든 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런 시간, 참 좋다.” 그 생각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무릉교
카페를 나와 향한 곳은 무릉교였다.
‘무릉’이라는 이름처럼,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문 같았다.
다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물은 투명했고, 햇살은 부서지듯 반짝였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그 바람이, 묘하게 사람 같았다.
나를 살짝 쓰다듬는 것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 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게 다 음악 같았다.
눈을 떴을 땐, 햇살이 조금 더 부드럽게 변해 있었다.
다리 건너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그냥 모두 행복해 보였다.
아이들은 물수제비를 뜨고, 연인들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는 그저 그걸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괜찮다, 지금 이대로 충분해.” 그 생각이 들자, 오랫동안 쌓여 있던 무언가가 천천히 흩어졌다.
돌아오는 길
차로 돌아오는 길, 창밖의 풍경이 어쩐지 다르게 보였다.
전날 봤던 산도, 들판도 그대로인데.. 내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그게 아마 여행의 힘일지도 모른다.
아무 이유 없이 떠나서,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일.
‘럭셔리글램핑 W’에서의 고요한 밤, ‘묵실’의 달콤한 꿀카이막, 그리고 ‘무릉교’의 바람과 햇살.
그 모든 게 한데 섞여 오늘의 나를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들어줬다.
운전대를 잡고 라디오를 켰다.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흐르고, 햇살이 유리창에 부서졌다.
나는 그저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또 이런 하루를 만나러 가야지.” 그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마음이 조용히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