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오면 늘 비슷한 길을 걷는 줄 알았다. 해운대, 광안리, 남포동… 늘 붐비고 익숙한 풍경. 그런데 이번엔 조금 다르게 걷고 싶었다. 북적거림 대신, 색다른 하루. 그래서 고른 길은 동화 같은 마을, 무한리필 랍스터, 그리고 한옥 카페였다.
안데르센 동화마을
처음 골목에 들어섰을 때, 알록달록한 벽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사실 관광지 벽화 마을은 조금 지겨운 편이다. 비슷한 포즈, 비슷한 그림, 뻔한 사진. 그런데 여긴 조금 달랐다.
인어공주가 그려진 벽 앞에서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녔다. 엄마는 핸드폰을 들고 “한 번만 더!”를 외치고, 아이는 인형처럼 팔을 벌리며 웃는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니, 어릴 적 내 모습이 겹쳤다. 동화책을 베개 옆에 두고 잠들던 밤, 작은 손전등 불빛 아래에서 “그다음은 어떻게 될까?” 설레며 책장을 넘기던 기억.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바람에 펄럭이는 작은 깃발을 올려다봤다. 색색의 천 조각이 파도처럼 흔들렸다.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냥 이 골목이 나를 동심으로 데려간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엔 아무 걱정 없었는데, 지금 나는 왜 이렇게 많은 짐을 지고 사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웃었다.
바이킹스워프
점심으로 찾은 곳은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랍스터를 먹으러 왔다. 깔끔한 건물 내부에 2층에 있고 트레이드 마크가 우리를 반겨주는 듯 보였다. 입구부터 가슴이 두근두근, 당일 환율에 따라 가격 변동이 있기 때문에 입구 계산대 앞에는 오늘의 환율이 기재되어 있었다.
첫인상은 호텔 로비에 있는 테이블 느낌이 났다. 우리는 자리를 안내받고 시그니처 랍스터 코너로 달려갔다. 커다란 랍스터 1마리를 통으로 조리하여 내어 주는데... 순간, 속으로 ‘와…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는 날이구나’라며 엄청 신이 났다.
랍스터 속살이 꽉꽉 차 있어서 너무 부드러웠고 쫄깃쫄깃했다. 같이 주신 버터 소스를 찍으면 고소한 맛이 배가 되어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스시와 회 코너에서 가져온 단새우도 참 맛이 좋았다. 캐비어가 들어간 음식부터 따뜻하고 맛있었던 해산물 요리까지 너무 완벽한 곳이었다.
처음엔 가격대가 있는 편이라 망설였는데, 기념일에 한 번씩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망고도 생망고로 이쁘게 잘 준비되어 있어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우리는 계속해서 열심히 랍스터를 먹었고, 케이크랑 젤라토로 마무리했다.
오늘은 배가 터지도록 먹자고 했지만, 생각만큼 많이 먹지 못해서 아쉽기도 했다. 그래도 너무 만족스럽던 퀄리티에 가격이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랑 또 함께 오고 싶은 그런 곳이었다.
하녹
배가 불러도 달달한 디저트는 또 생각난다. 그래서 여행의 마무리는 늘 카페에 가는 것이다. 이번에 우리는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전통 디저트를 파는 카페에 가보기로 했다. 이름은 ‘하녹’이었다.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푸르름과 함께 나무 향이 가득 퍼졌다. 우리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떡구이, 흑임자 라테와 오미자 자몽에이드를 주문해 보았다.
꿀에 찍어서 먹는 떡구이는 제일 인기 메뉴라고 한다. 흑임자 라테는 단맛이 과하지 않고, 고소한 풍미가 있었다. 오미자에이드를 한 모금 마시자, 방금 전까지 랍스터에 지배당하던 나의 배가 차분히 가라앉았다. 창밖을 바라보며 숨을 고르는데, 나무 기둥과 기와지붕이 만들어내는 그림자가 마음까지 시원하게 덮어주는 것 같았다.
요즘 대세인 베이커리 카페나 대형 카페 투어도 당연히 좋지만, 한 번씩은 조용한 카페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 전통의 모습을 닮은 카페도 좋을 것 같다. 이번에도 만족할 만큼 좋은 카페를 픽해서 주위에 소개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오늘의 부산, 오늘의 나
마치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동심으로 돌아가서 마주한 동화 같은 순간들, 오늘만큼은 랍스터를 실컷 먹어보자며 접시 가득 담았던 웃음이 났던 모습, 한옥에서 힐링 시간을 보냈던 시간들까지. 이 모든 게 큰 이벤트가 아닌 소소한 일상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작은 순간순간들이 모여서 하루를 알차고 기쁘게 만들었다.
정말 유명한 명소보다, 그날의 날씨와 공기, 함께 웃었던 모습들이 내 마음속 깊이 새겨지는 것 같다. 오늘의 부산은 내게 그런 하루를 선물했다. 언젠가 다시 이 길을 걸어도, 오늘의 색깔은 오늘만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문득문득 이 하루를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