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묘하게 설레었다. 사실 언양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좀 낯설고, 또 어쩐지 시골스럽게 따뜻한 이미지가 있어서 괜히 마음이 가볍게 두근거렸다. 유명한 도시도 아니고, 관광지가 넘쳐나는 곳도 아닌데… 그게 오히려 좋았다. 요즘엔 그런 소박한 여행지가 더 끌린다.
자수정동굴나라
입구에 섰을 때, 확실히 공기부터 달랐다. 바깥은 따가운 햇살 때문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데, 동굴 앞에서는 차갑고 습한 공기가 확 느껴졌다. 그 순간부터 기분이 묘하게 바뀌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딴 세상에 온 기분이 들었다. 어두운 조명 사이로 벽에 비치는 보랏빛 자수정이 반짝였다. 그냥 돌인데, 왜 그렇게 신비롭게 보이는 걸까. 물방울이 떨어져 바닥에 번지는 소리마저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었다.
이번에 우리는 보토 체험도 같이 해보기로 했다. 구명조끼도 챙겨 입고 동굴 안을 구석구석 돌아봤다. 약간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걸어서 구경할 때 보다 더 자세히 동굴을 살펴볼 수 있어서 신기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안내원의 해설까지 곁들여져서 꼭 강추하고 싶은 코스이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는 걸 들으면서, 나는 잠깐 나도 어린아이가 된 듯한 기분에 젖었다. 어릴 적에는 이런 동굴에 와도 별 감흥 없었는데, 나이를 먹으니까 다르게 보인다. 뭔가 오래된 자연 속에 들어와 있는 그 자체가 감사했다.
기와집불고기
솔직히 말하면, 언양에 온 이유 중 절반은 불고기였다. "언양불고기"라는 이름 자체가 워낙 유명하고 방문할 때마다 항상 맛있었던 기억뿐이다. 아이들도 정말 좋아하는 중 하나이다. 이번에 우리는 ‘기와집불고기’를 가보기로 했다.
들어서자마자 숯불 냄새가 확 코끝을 찔렀다. 순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면서 나는 ‘치익’ 소리가 어찌나 맛있게 들리던지.. 그 소리 하나로 이미 맛이 보장된 기분이었다.
고기를 한 점 집어 입안에 넣자… 와. 달큼한 육즙과 숯불 향이 동시에 퍼졌다. 단순히 고기 맛이 아니라, 뭔가 마음이 따뜻해지는 맛이었다. 그냥 웃음이 났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랑 눈이 마주치자 둘 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은 말보다 미소 하나면 충분했다.
옆 테이블에서 아이가 고기를 맛있게 씹으며 까르르 웃는 모습을 보니, 어릴 적 가족들이랑 가던 고깃집이 떠올랐다. 그때는 그냥 배불리 먹는 게 행복이었는데, 지금은 그 기억이 맛과 섞여 또 다른 감정이 된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언양불고기를 꼭 먹어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해월당
든든하게 먹고 나니 꼭 카페에 가고 싶어졌다. 언양의 유명 카페 중 하나라는 ‘해월당’을 찾았다. 이름이 너무 예쁘다. 마치 시 한 구절 같다.
카페에 들어서자 차분한 음악과 은은한 커피 향이 퍼졌다. 큰 창가에 앉자 산자락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창밖을 멍하니 바라봤다. 뜨거운 라테를 마시는 순간, 오늘 하루가 부드럽게 감싸지는 느낌이었다.
친구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은 그냥 말없이 있었다. 그 고요가 참 좋았다. 사실 일상에서는 늘 뭔가를 해야 하고, 뭔가를 말해야 하는데… 여행지에서는 말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냥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햇살이 점점 기울고, 카페 창으로 들어오는 빛이 노란색으로 바뀌는 걸 보면서, 나는 괜히 감상적이 되었다. ‘오늘 하루, 참 잘 보냈다.’ 마음 깊숙이 그렇게 느껴졌다.
하루를 마치며
언양에서의 하루는 특별한 일정이 많지 않았다. 자수정동굴나라에서 서늘한 공기와 반짝이는 보석을 보고, 기와집불고기에서 숯불 향 가득한 고기를 먹고, 해월당 카페에서 잠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실 이게 전부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 단순한 순간들이 나를 꽉 채웠다. 꼭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어도, 꼭 화려한 여행이 아니어도, 이렇게 마음이 따뜻해질 수 있구나 싶었다. 언양은 나에게 ‘소소하지만 오래 기억될 하루’를 선물해 준 곳이다. 언젠가 또 가게 된다면, 아마 오늘을 떠올리며 다시 웃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