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의 셋째 날 아침, 유난히 조용했다.
파도 소리가 숙소 창문을 스치고, 바람이 천천히 커튼을 흔들었다.
그 바람 속에 약간의 짠내, 그리고 햇살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자, 어제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그냥, 오늘은 조금 더 천천히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스누피가든
제주 동쪽 끝자락, 초록빛 들판을 지나 한적한 길 끝에 ‘스누피가든’이 있었다.
멀리서도 보였다. 하얀 스누피 조형물들이 햇살 아래에서 마치 웃고 있는 것처럼.
입구에서 티켓을 받고 안으로 들어가자, 피너츠의 세계가 펼쳐졌다.
아이들이 들뜬 목소리로 “스누피야!” 하고 부르며 뛰어다녔다. 그 소리가 참 귀여웠다. 나도 모르게 미소가 났다.
한쪽 벤치에 앉아 풍경을 바라봤다. 유리온실 안에는 초록빛이 가득했고,
그 안에 놓인 스누피 인형들이 햇살을 맞고 있었다.
‘행복은 사실 별 게 아니야.’ 벽에 붙은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그 한 줄이, 괜히 마음을 찌르듯 다가왔다.
나는 잠시 그 앞에서 멈춰 섰다. 요즘은 ‘행복’을 너무 큰 걸로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웃는 순간도 충분히 행복일 텐데...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잔디 위로 부드러운 바람이 흘렀고, 하늘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파랬다.
스누피가 책을 읽는 모형 옆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그 장면이 어쩐지 마음속 어딘가에 오래 남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아이스라테를 시켜 들고, 유리창 너머를 바라봤다.
어른들이 잠시 어린아이가 되는 곳. 스누피가든은 그런 곳이었다.
세상 모든 피로가 잠시 멈추는, 단정하고 따뜻한 공간이었다.
소금바치 순이네
점심 무렵이 되자, 배가 고파왔다. 이번엔 ‘돌문어볶음’이 맛있다는 소금바치 순이네로 향했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도로를 따라가자, 파도소리가 차창 안으로 밀려들었다.
가게 간판은 소박했지만, 바다를 등지고 서 있어서 뭔가 믿음이 갔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하면서도 매콤한 냄새가 확 퍼졌다.
주방에서는 불판 위로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돌문어 2인분 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불판에 양념이 얹어졌다.
지글지글 소리가 시작됐다. 양념이 끓어오르며 붉은빛이 퍼지고, 돌문어가 춤추듯 익어갔다.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입에 넣자마자 단짠의 양념과 바다의 향이 동시에 밀려왔다.
쫄깃한 식감이 입 안을 가득 채우고, 매콤함이 천천히 퍼졌다.
매운 것도 아닌데, 어쩐지 눈이 살짝 뜨거워졌다. “이 맛은 진짜 제주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함께 나온 미역국도 진했다. 바다 향이 그대로 느껴졌고, 국물 한 숟갈에 마음이 풀렸다.
주인아주머니가 “어디서 왔어요?” 묻길래 “서울이요.” 했더니
“그래요? 이거 좀 더 드셔요. 문어 오늘 신선해요.” 하며 웃었다. 그 미소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창가 자리에 앉아 식사를 마무리하면서 바다를 봤다.
바람이 세게 불어 파도가 하얗게 일었다. 젓가락을 내려놓고 그 소리를 한참 들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진짜 제주를 먹고 있구나.’
평대라움
해가 조금씩 기울 무렵, 숙소로 향했다. 이번엔 ‘평대라움’이라는 독채 펜션이었다.
지도에는 작게 표시되어 있었지만, 도착하자마자 마음이 탁 놓였다.
하얀 벽, 나무 문, 그리고 앞마당의 잔디.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모든 게 완벽했다.
차를 세우고 문을 열자, 은은한 디퓨저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아, 이건 쉬라는 신호구나.’
해가 지는 중이라 붉은빛이 천천히 물결 위로 내려앉았다. 그 빛이 벽을 타고 들어와 방 안까지 번졌다.
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커피를 내려 마셨다. 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니 따뜻했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바람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잔향 같은 파도 소리. 그게 오늘 하루를 마무리하는 배경음 같았다.
밤이 되자 하늘엔 별이 가득했다. 숙소 앞마당에 나가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빛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웠다. 그 아래에서, 괜히 혼잣말처럼 말했다.
“오늘, 참 잘 살았다.”
모든 게 완벽했던 건 아니다. 조금은 외로웠고, 조금은 허전했지만,
그 모든 감정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서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평대라움이라는 이름처럼, 그 밤은 정말 ‘평대’ 평온하고, 대답 없는 시간이었다.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나 자신을 만났다.
돌아오는 길
차분히 생각해 보니, 이번 여행은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대단한 곳을 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하루하루가 마음 깊이 남았다.
스누피가 웃던 정원, 문어볶음의 불맛, 평대라움의 별빛. 그 모든 게 이어져 하나의 기억이 되었다.
그건 그냥 ‘제주에서의 하루’였지만, 나에겐 ‘다시 살아나는 하루’였다.